연구소 칼럼
인권과 피해자 치유에 관한 이야기
글보기
제목치유 그 옆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2012.12.27)2017-11-14 15:24:16
작성자
 
[칼럼] 치유 그 옆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이영남(임상역사가, 박사)
 
 
  고통보다도 고통의 무의미가 더 고통스럽다. 고통은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내 몸에서, 가족 안에서, 우리 사회에서 살아 작동하며 또 다른 고통을 낳고 있다. 근원적으로 병소를 제거한다는 것도, 증상별로 대처한다는 것도 이미 늦지 않았을까? 그 보다는,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이 자리잡을 장소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 어떤 고통을 겪었느냐보다는 현재 살아 움직이는 고통을 어떻게 정리하고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길이고 우리 사회에서 고통이 어디에 자리잡을 것인지를 찾는 유의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치유작업은 긴급구호의 성격을 지닌 것이므로 즉시 시행되어야 한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은 하세요, 이런 권고나 후속과제가 아니라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이다. 너무 배가 고프면 사실 다른 것을 하기는 힘들다. 폭력생존자 개개인에 대한 의학적 치유작업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수적인 작업이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서 진실규명, 가해자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진실의 실상, 진실의 범위, 가해자 처벌방식 등을 과연 누가 어떻게 정한단 말인가? 외국의 사례를 모방해서, 지식의 힘을 빌어서? 어떤 진실이고, 어떤 처벌인가 하는 것은 생존자 치유작업에서, 그리고 치유의 일환으로 논의가 되어야 한다.
 
  남영동에 먼저 세워져야 하는 것은 도서관, 박물관, 기념관 등의 문화시설이 아니라 치유센터이다. 말하자면 ‘김근태 기념관’이 아니라 ‘김근태 치유센터’가 먼저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한 무수한 피해자, 생존자들을 의미한다. 나아가 한국현대사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고문을 받은 사람들을 상징한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70여 국가에 200여 개의 고문생존자 재활센터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아직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요컨대, 치유센터는 어디에선가 먼저 시작된 후 전국적으로 몇 십개가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치유작업은 끝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한 시작은 아닐까? 배를 채운 후 해야 할 일, 긴급구호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에 대해 물어야 한다. 과연 치유 옆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이것은 치유의 문화제작적 성격과 역할에 대한 생산적 물음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텃밭의 중요성을 말하고 실제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텃밭 중에는 ‘정원텃밭’이라는 것이 있다. 정원텃밭은 꽃과 작물을 같이 심는 텃밭이다. 꽃이 심어져 있으니 보기 좋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치 봄날의 벌과 꽃처럼, 생태정원에서 꽃과 작물은 서로에게 호혜적인 생태적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배추를 심는다면 배추의 성장에 이로운 꽃을 심어서 서로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가꾸는 작업이 생태정원 농업이다.
 
  우리가 고통을 클리닉에만 두지 않고 볕이 좋고 바람이 잘 부는 정원텃밭으로 가져간다면, 고통의 옆에 심어야 할 꽃은 무엇일까? 과연, 고통의 꽃은 무엇일 수 있을까? 하나의 예만 들어본다. 2012년 12월 3일, 창덕궁 근처의 조용한 절에서 한 고문치유단체에서 주관하는 치유작업이 있었다. ‘진실의 힘 마이데이-맘풀이’라는 치유작업이었는데, 이 치유작업에는 문화제작의 성격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와 고문생존자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주변에는 다른 고문생존자들과 고문생존자의 가족이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고 중간중간 이야기를 같이 나눴다.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유로 모여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경청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경청-대화의 문화”가 고통의 꽃으로 피어났던 장면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경청하고 대화를 나누는 문화가 있을까, 자문해본다. 어느 고통이든 고통은 절대적이다. 역사의 격랑을 거쳐온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절대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고통은 서로 말하고 경청하고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만들면서 상대화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시내 곳곳에 있는 카페나 술집에서 이런 경청과 대화의 문화가 흐르기는 힘들 것이다.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가해자에게 갇히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활보하며 문화를 만들어가는 방식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런 경청과 대화의 문화를 촉발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고통을 받은 사람이 치유의 과정에서 고통을 사람들과 공유하려면, 햇살이 있는 곳이 좋다. 빨래는 볕이 좋을 때 널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

  프로필: 이영남(임상역사가, 박사)
 
 
  "'다시 쓰는 나의 역사'를 모토로 임상역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페이스북 트위터
[때아닌 모든 곳에서 전시] 안내전시기간: 2024. 2. 6 - 2024. 3. 24 전시장소: 김근태기념도서관 전관 기획: 이희경참여 작가: 워꺼라운드 (김건희, 방아란, 양효윤, 이동경, 이희경) 주관.주최: 워꺼라운드후원: 인권의학연구소, 김근태기념도서관 퍼포먼스: 2024. 2. 17. 14시1. <잘 지냈나요?>구성: 이희경 / 낭독: 이동석2. <자화상>시: 정명자 / 구성: 이동경, 양효윤 / 출연: 정명자, 양효윤 / 음향디자인: 신동원원문보기 : lrl.kr/Jhmj ... See MoreSee Less
페이스북으로 보기
[공지] 2024 정기 총회 개최 안내1. (사)인권의학연구소는 모든 임원과 정회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와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2. 오는 2024년 2월 26일(월) 늦은 5시부터 인권의학연구소는 정관 제20조(총회소집)에 의거하여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 정기총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3. 2024년 정기총회는 인권의학연구소 1층 소강당에서 대면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4. 이번 정기총회 안건은 - 2023년도 사업보고와 결산보고에 대한 감사결과 심의 - 2024년도 사업계획(안)과 예산계획(안) 심의 - 기타 안건5. 부득이하게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임원과 정회원께서는 2024년 정기총회 개최(2월 26일) 전까지 위임여부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첨부한 위임장을 작성하시어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으로 문자 사진(010-6375-6234), 이메일(imhrc@naver.com), Fax(02-711-7589)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랍니다.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 (02-711-7588, imhrc@naver.com) ... See MoreSee Less
페이스북으로 보기
[2024년 인권의학연구소 장학생 모집](사)인권의학연구소는 2024년 제3회 인권의학연구소 장학생을 모집합니다. 인권의학연구소 장학사업은 연구소 후원회원이자 『열세 살 여공의 삶』의 저자인 신순애 선생의 기부로 마련되었습니다.신순애 기부자의 지향에 따라 국가폭력 피해자와 가족들의 교육을 위해 소중하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본 장학사업을 통해 국가폭력 피해 생존자는 물론 그 2, 3세대가 민주화를 위한 국가폭력 피해자의 저항과 희생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자세항 사항은 아래 포스터와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imhr.or.kr/index.php/notice/?board_name=notice&mode=view&board_action=modify&board_pid=79&search_...문의사항은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으로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이메일 : imhrc@naver.com- 전 화 : 02-711-7588#인권의학연구소, #장학사업,#2023년장학생모집,#장학생모집, #국가폭력,#교육,#장학생, #장학생선발 ... See MoreSee Less
페이스북으로 보기
[초대합니다]김근태기념치유센터‘숨’ 개소 10주년에 초청합니다.6월 26일(월) 오후 3시,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개소 10주년 기념행사를 합니다. 1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는 물론 만찬도 준비되어 있습니다.지난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처음의 각오와 의지를 겸허히 돌아보는 자리에 함께 해주세요.세월이 흘러도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피해자들과 정의의 편에 서 있겠다는 꺾이지 않는 마음을 다시 모아보는 자리에 함께 해주세요. -일시: 2023년 6월 26일 오후 3시-장소: 성가소비녀회 내 김근태기념치유센터‘숨’(주소: 성북구 길음로 9길 46번지)-문의: 02-711-7588김근태기념치유센터‘숨’ 올림 ... See MoreSee Less
페이스북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