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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김할머니’의 자기결정권 (2011.11.1)2017-05-31 12: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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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할머니’의 자기결정권


허 대 석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2009년 ‘김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도 된다는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큰 논쟁이 있었으나 초점이존엄사인지 안락사인지 등 죽음의 모습에만 너무 집중되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어떻게 보장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는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은 의학적 결정절차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 왔다고 생각한다.


첫째, 의학적 결정을 하는 주체의 변화이다. 전통적으로 의학적 결정은 의사가 하고 환자가 동의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검사나 시술여부의 판단은 의사의 기술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에서 연명시술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를 결정할 때에는,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거부한다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의사의 기술적 판단보다 우선하고 있음을 대법원은 판결문에 담고 있다.
 
둘째, 의료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의료기술뿐만 아니라 ‘가치’ 문제도 고려하고 있다. 김할머니 사건에서 해당병원은 8%의 확률로 의식을 회복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연명장치를 중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병원의 의료진들은 회생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기술적 판단이 애매한 상태였다.
 
이같이 기술적 판단이 불확실한 상황에 대하여,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원하지 않았다는 평소의 가치관을 법원은 최종 판결의 근거로 삼고 있다. 연명장치와 같은 문제에서 기술적 판단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가치’를 고려한 결정했다는 것은, 선진국들이 수십 년의 논의를 거쳐 확정한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를 우리나라도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셋째, 인공호흡기 제거 결정에 관여한 의사를 살인방조죄로 처벌한 보라매병원 사건의 영향으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논의가 중환자 치료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의사들의 책임문제를 면해주기 위한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같은 맥락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이라는 용어도 의사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고 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의 시각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에 대한 논의로 다루어지는 것이 더 타당하다. 같은 맥락에서, DNR (do-not-resuscitate)도 ‘심폐소생술금지‘로 번역되기 보다는 ’심폐소생술을 거부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
 

 

 
대법원판결이 이루어지고 2년 이상이 흐른 시점에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검토해 보면, 긍정적인 변화로는 과거에 비해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하는 경우가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2010년에 개정되어 2011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암관리법 개정안에서 말기 암환자의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 점이다.
 
하지만,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의사결정에 반영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고 있지 못하다. 가장 큰 장벽은 문화적 요인이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암환자의 경우, 환자가 암이라는 질병이 발생했는지 여부는 본인에게 대부분 통보하고 있으나, 임종이 임박한 말기로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경우는 20-30% 수준에 불과하다.
 
자신의 병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는 20-30%의 환자는 ‘사전의료의향서 (사전의료지시서, advance directives)'를 통하여 본인이 어떤 치료를 원하고 어떤 것은 원하지 않는 지를 문서로 남길 가능성이 있지만, 70-80%의 말기 환자는 자신의 병 상태를 정확히 통보받지 못한 상태에서 임종하고 있다. 이 경우, 환자의 가치관을 어떻게 의학적 결정에 반영할 것인가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김할머니 사건의 경우도, 의식 소실로 의사표현을 할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환자 본인이 평소에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법원에서 진술하였고, 법원도 판단하여 환자의 가치관을 추정적으로 반영시켰다. 다른 표현으로 요약하면, 추정적 의사에 의한 가족들의 대리결정이었다. 이후 진행된 입법화 논의에서 대리결정 문제에 대하여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현재도 관련법 제정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환자의 가치관을 의학적 결정에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환자에게 질병상태를 정확히 통보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적절한지? 환자에게 죽음에 대하여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음은 한국, 일본 및 중국과 같은 유교 문화권에서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같은 점을 반영하여, 2000년 제정된 대만의 자연사법은 환자의 가치관을 반영하여 가족들에 의한 대리결정을 인정하였다. 또, 2007년 일본은 정부 가이드라인을 통하여, 환자 본인이 직접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 환자의 가치관을 반영하여 가족과 의료진이 상의하여 어떤 결정이 환자에게 최선인지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임종 과정에서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와 같은 무의미한 연명시술이 여전히 진료현장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의료진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방어적인 진료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가족들은 환자에게 임종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는 문화적 장벽으로 인하여, 환자에게 불필요한 고통만 가중시키는 연명시술이 계속되고 있다.
 
회생가능성이 없는 말기환자에서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은 의료진의 기술적 판단보다는 환자의 가치관을 반영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원하지 않는 환자들의 자기결정권이 반영될 수 있도록 관련 법령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공동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1 허대석 (2008).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권리. 대한의사협회지 51(6):524-529
2. 臺灣行政院衛生暑: 자연사법; 호스피스 의료조항 (選擇安寧緩和醫療意願書), 2000
3. 일본후생노동성: 종말기의료의 결정 프로세스에 관한 가이드라인, 2007

프로필
 
허 대 석 (서울대학교 내과학 교수)
 
학력
1974‐1980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81‐1983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석사
1983‐1986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사(Ph.D 종양내과전공)
 
연구경력
1986‐1989 미국 University of Pittsburgh, Pittsburgh Cancer Institute연구원
1993‐1994 미국 University of Michigan 교환교수
2003‐2005 Chairman, Scientific Committee, 6th Asia‐Pacific Hospice Conference
2003‐2005 Chairman, Scientific Committee, 18th Asia‐Pacific Cancer Conference
2003‐2006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정책연구실장
1990-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교수
2004‐2008 서울대학교병원 암센터 소장
2006‐2008 서울대학교병원 첨단 세포‐유전자치료센터장
1998‐2010 서울대학교병원 호스피스실 실장
2010‐현재 근거창출임상연구국가사업단 단장
2008‐현재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원장
 
전문분야
의료기술평가, 종양내과학, 종양면역학 및 완화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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