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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2012.4.26)2017-05-31 12: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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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통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개인의 치료와 사회적 치유의 연관성

 

이영문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올해로 제주 4.3사건은 64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보면서, 반성하지 않는 오만한 부패권력들의 잔인함과 뻔뻔스러움에 우리들 가슴은 분노로 뒤엉켜 있습니다. 개인의 심리적 성향이 중심이지만, 불가항력적인 폭력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속에 내재된 분노와 두려움이 일상생활을 뒤덮게 됩니다.

 

 

 
집단에 가해진 무차별적 폭력에 대해 개인이 겪게 되는 정신병리에 대한 규명은 나치하의 “강제수용소 증후군”과 같은 연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한 연구보고서에도 비교적 최근의 진술과 치료과정,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증상의 발현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 개인의 기억을 지배한 외상이 고통스러움으로 인식되고,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에 대해 개인적 치료가 가진 한계를 사회적 치유과정속에 어떻게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첫째, 개인에 대한 충분한 치료가 이루어졌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상에 대한 스트레스반응이 극심하여 지속적으로 정신의학적 증상으로 남아 있는가에 대한 규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확한 정신의학적 진단이 이루어져야 하고, 희생자는 이를 적극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사회적 치유과정에 대한 이행이 가능합니다.

 

둘째, 사회적 치유과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광주민주화 항쟁과 비교했을 때, 제주 4.3사건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더 늦게, 더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치료와 사회적 치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일정한 궤도에 맞물려 돌아갑니다. 가령 개인의 정신력이 강하다거나, 정신건강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성숙된 경우라 하더라도, 사회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개인은 다시 절망하고, 회복됨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해 정신병리적 측면에서는 퇴행의 경로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프리모 레비의 삶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빅터 프랭클과 더불어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대명사로 거론되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빅터 프랭틀은 의미치료(logo therapy)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의 생명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많은 강연도 하였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버려짐의 경험(Being rejected)을 극복했지만, 잊혀짐(Being forgotten)과 사회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음에 절망했습니다. 개인의 위대함, 생존에 대한 강한 집념, 불굴의 의지력 등의 찬사와 더불어 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로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이 정치적으로 타협되고, 진정으로 반성되지 않는 독일과 유대인 공동체의 삶의 방식은 레비를 좌절시켰습니다. 진정한 사회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거론하며 삶을 마감합니다.


억압된 분노는 내면의 흐르지 못한 상처가 되고 자신만이 아닌 타인들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삶을 잉태시킵니다. 생존자들이 겪는 이런 반응은 집단에도 적용되어 공동체의 삶을 모두 부정하게 됩니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본능적 욕동에 대한 억압은 벗어던지게 하고,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이상을 포기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불가항력적 폭력에 노출된 개인은 집단의 반응에 따라 개인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개인화가 상실된 집단에 대한 사회의 배제가 뒤따르게 될 때, 그 내부에 속한 개인의 무기력감은 더 커지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사회적 치유의 힘이 왜 개인을 치료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폭력으로 상실된 개인화를 회복시키는 힘이 바로 사회의 관심, 적절한 심리적 보상, 버림에 대한 반성, 잊음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선행되어야합니다.

 

 

 
국가 폭력에 의한 외상의 개인 치료는 사회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두운 정신과 진료실에서 은밀하게 치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과정에 수반되는 고통의 기억에 대한 내용은 개인의 경험으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하지만, 가해집단에 의한 용서를 통해 이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고, 사회가 이를 지켜보고 담보한다는 약속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치유는 관심만으로도 큰 효과를 지닙니다.

 

다시금,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의 정신의학적 치유가 개인치료만이 아닌 집단에 대한 치유, 더 나아가 사회적 치유과정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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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영문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이사)

 

1992년 이영문교수를 포함한 5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보건법안 제정을 위해 정신보건연구회 모임을 시작하여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1996년 경기도 정신보건사업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수용시설에서 지역사회로”를 내세우며 정신장애자들의 탈수용화를 주장한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의‘정신장애인 인권증진을 위한 국가보고서’사업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정신장애인의 '당사자 운동'의 길을 확보하였다. 2008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군대내 자살자를 대상으로 한 심리부검위원회에서 활동하여 군대 내 '의문의 자살’이 가혹행위에 따른 '불가피한 자살’여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현재, 정신보건사업을 총괄하는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 이음병원 정신과 전문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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