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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성희 _“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지만” (2012.10.31)2017-09-18 16:47:15
카테고리인권의학실천가(단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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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클리닉 인터뷰]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지만”
 
이성희 선생님 인터뷰
(조작간첩사건인 울릉도사건으로 17년 복역, 현재 재심을 기다리는 중)
 
 

 
  1974년 3월, 박정희 정권은 아무런 죄가 없는 40여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간첩 누명을 씌웠다. 이성희 선생님도 그 중 하나였다. 선생님은 원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7년을 복역해야 했다. 그 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이니, 당사자들은 어떠하겠는가. 너무나도 끔찍했던 일이었기에 다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어쩌면 시간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이성희 선생님 역시 당시의 시간을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이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 사건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알렸고, 재심을 청구했다. 이성희 선생님을 비롯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누명을 벗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40년만에.
 
  "내가 일본 유학 당시 재일교포 이좌영씨는 중학교 3년 후배로 일본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내가 유학 4년 중 3년 동안 이좌영씨로부터 생활비, 학비 등 많은 경제적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좌영씨가 간첩으로 의심받아 나를 비롯하여 이좌영씨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좌영씨의 지령 하에 행동한 것으로 간주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전원 간첩으로 조작 입건 재판에 회부한 것입니다."
 
중정 전주 분실에서 수사관들이 손으로 따귀를 대리고 머리를 때리면서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부터 1m 정도의 몽둥이로 사정없이 구타하더니 권총을 보여주면서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학생들 눈치 채지 못하게 풀어준다, 분명히 뭔가 더 있으니 빨리 진술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하였고 잠을 못 자게 계속 찌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옆방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와 집사람이 와서 당하는 것이 아닌게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중략)
 
남산분실로 이동해서 조사 받을 때 수사관들이 ‘동생 옷 벗게 해야 하는데 아직 결정이 안 되었으니 협조하라’며 회유를 하다가 얼마 뒤 건장한 청년 3~4명이 들어와 장작을 바닥에 깔더니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한 뒤, 야전 침대에서 각목을 빼서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이 ‘난수표, 무전기를 내놓아라.’ 하면서 1시간 정도 때려서 정신이 반쯤 나갔으며 온몸은 피와 내복이 엉겨 붙어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는 조서를 작성하였다. 구타를 당하고 조서를 작성하기를 반복했다.
 
(중략)
 
수사관이 서울구치소로 찾아와 보안과장 입회하에 조사를 하는데 보안과장 소파에 앉히더니 제자 중 진아무개를 아느냐고 물어봐서 사진이라도 보여주면 기억할 수 있겠다고 하자, 중정 수사관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이런 놈은 죽여버려야 한다.’며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발길질을 해댔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문 중 -

 
  당시 정권은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넣기 위해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성희 선생님에겐 간첩으로 의심되는 이좌영씨와 친분이 두텁고, 북한에 다녀온 사실이 있으며, 당시 대구 2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로 재직중이던 동생 이삼희 준장과 하루 밤을 함께 지내며 국가의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부인했지만 돌아온 건 발길질과 매질이었다. 결국 그 어느 하나 진실이 아니었던 조서를 강제로 받아써야만 했다. 재판에서 이성희 선생님도, 그의 동생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재판 결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 이렇게 해서 만 17년의 징역을 살게 됐다.
 
  "그렇게 나의 인생 49세에서 66세까지 형무소에서 보냈습니다."
 
  17년의 수감생활이었다. 계절이 열일곱 번 바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끔찍하고 긴 시간 동안 이성희 선생님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었다.
 
  "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의무과에서 간병부로 복역했습니다. 간병부로 일하는 동안 출소할 때까지 불쌍한 사람들을 정말로 성심껏 돌보았습니다. 불쌍한 재소자들 나 때문에 목숨을 유지한 사람도 한두명이 아닙니다. 징역 사는 동안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재미로 모든 고통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수감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사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돌보고 싶은 것은 가족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으로 인해 비참하고, 두렵고,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언젠가는 단 하루라도 위로하고 봉사하고 싶다는 소망을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다. 출소 후에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계속되는 보호 감찰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이렇게라도 다시 가족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냈다.
 
  "출소 후의 시간은 다만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말도 꺼내기 싫은 큰 아주 큰 슬픔과 아픔이 있지만 그냥 덮겠습니다. 우리 부부의 불문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어 감정을 헤집고 싶지 않았던 선생님의 대답이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냥 덮고 싶다'던 짧은 대답으로 짐작한다. 회상만으로도 전신이 아파오는 고통이 아닐까 하고.
 

 
 선생님은 자신의 유년 시절, 청년 시절은 '무난'했었다고 기억한다. 어릴 적 신식교육을 받은 아버지와 동네에서 자선가로 명망높았던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어머니는 걸인들에게 밥과 반찬을 성심껏 차려서 대접하였고, 겨울철에 동네 사람들에게 거절하지 않고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때문에 6.25 전쟁이 나고 동네마다 부자들은 대부분 인민위원회에 불려가서 곤혹을 치루는 중에도, 선생님의 집은 그 소란을 비껴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쌓아둔 인망 덕분이었다.
 
  청년기에도 큰 사건은 없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청년기에 대해 '박정희시절 학업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현재 선생님의 박정희에 대한 입장은 무척이나 뚜렷하다.
 
  "박정희는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항상 믿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군에서 남로당 조직책으로 있으면서 사건이 불거지자 동료들의 명단(남로당 조직원)을 넘겨주고, 자기 혼자 사형을 면죄 받은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무신론자인 선생님은 '내세'나 '하늘이 내리는 벌' 같은 것을 믿지는 않지만 박정희만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인혁당 사건 등 너무나도 비인간적으로 사람들을 탄압했다. 그러던 그의 딸이 대선 후보로 나온 것도 선생님에게는 분노를 금치 못할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울릉도 사건 당시 항상 박정희와 함께 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울릉도 사건을 전후로 선생님은 박정희라는 독재자 외에, 이 사회와 이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통일 문제에 대해서, 선생님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우리 민족의 절실한 숙제'라며, 사상과 이념은 다르지만 정상회담과 같은 국가 차원의 만남의 장과 민간 교류의 빈도를 높이고, 서서히 군축하면서 현재의 정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거기에 '미군 철수 시키고 남북간 자주적으로 외부 세력의 간섭 없이 평화 통일의 그날까지 우리 모두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이 덧붙었다.
 

 
  이성희 선생님은 현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재판의 과정 또한 수감 생활만큼 쉽지 않았다. 지난 10월 24일엔 이튿날 열릴 선고 공판이 미뤄진다는 전화를 받았다. 재판부의 말처럼 아직 선고를 할 준비가 덜 된 것인지, 박근혜의 대선 행보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법부의 못남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서 피고인 이성희 선생님은 자신이 누명을 벗지 못하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다시 한 번 뜬 눈으로 잠을 설쳐야만 했다.
 
  "너무나도 사실과 다르고 완전 조작된 사건입니다. 당연히 재판부에서 무죄로 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11월 8일 오전 10시- 재판재개 날짜가 다시 통보되었다.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과 아픔'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진실을 되찾고자 했던 선생님의 용기와 노력이 부디 제 빛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정리 :  김규연 (인권의학연구소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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