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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피해자 인터뷰] 하원차랑 선생님과의 만남 (2016.5.23)2017-08-17 12:39:26
카테고리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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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상도 사나이가 조작간첩이 되던 날

 

 

 

 - 하원차랑 선생 인터뷰-

임채도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장)

 
[지난 510일 서울대 축제기간 동안 열린 민가협 후원주막에서 하원차랑 선생을 만났습니다. 밀양 집에서 먼 길을 오셨습니다. 얼마 전 폐렴으로 입원하셨다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 걱정 반 반가움 반으로 달려갔습니다만난 이 임채도 사무국장]
 
 
하원차랑 선생은 1941년 경북 영천 생으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군 제대 후에는 부산에서 주로 살았다. 살면서 한번도 경상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대전 감옥을 제외하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시원시원한 성격은 180cm의 큰 키 마냥 거침이 없다.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으로 겨누기보다 툭툭 내뱉듯 치고나가는 일 본새나, 한 번 한 말은 거두지 않고 몸이 축나더라도 해내고야 마는 강단과 의리는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경상도식이다.
경남 밀양에서 이따금 아내와 KTX 타고 서울 나들이 할 때면 부인과 손잡고 다니는 모습을 보일만도 한데, 그런 친절도 참 인색하다. 그가 자리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부인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면서 뭘 안다고 그러노? 할 때면 동석한 사람들까지 얼음이 되고 된다.
 
선생은 가끔 이름 때문에 일본에서 태어난 것으로 오해 받는다. 처음 만났을 때 왜 일본식 이름이냐고 물었을 때, “부모님이 그렇게 지었지. . 그렇게 지냈지 뭐.” 군더더기가 없다. 부모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쓸 따름이다. 소소한 데 구애 안 받는 풍모.
 


이름 때문이었을까. 선생은 일생에 큰 전환점을 일본에서 겪었다. 때는 1970년대 말. 부산에서 트럭을 몰고 이런저런 장사를 하고 있을 때, 장사가 어렵기도 하고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걸쳐 한국은 오일쇼크에 이은 큰 불황을 겪고 있었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물가가 치솟고 기업 도산이 속출할 때다. 선생은 출로를 일본에서 찾았다. 마침 오사카에 살던 숙부를 통해 일자리를 얻었다.
 
당시는 해외 초청장이 없으면 출국조차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짧은 여행 비자를 끊어서 몇 달 단기 취업으로 막노동이라도 하고 돌아오면, 어느 정도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국내 임금과 일본의 임금 격차는 그만큼 컸다.
그는 그 때 일하는 현장에서 감독으로 있던 재일동포와 어울리게 되었다. 나중에 보안부대 조사를 받으면서 알게 되었지만, 현장감독은 총련 소속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친북 총련 - 친남 민단 이라는 구분은 일상에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 현장 감독만 하더라도 자신은 총련, 동생은 민단소속이었고 한다. 선생과 그와의 만남도 일상적인 직장 동료 관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선생이 귀국할 때 현장감독은 부산에 살고 있는 처조카에게 잠바 하나를 전해 주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사단은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그즈음 보안사는 일본을 드나들던 어느 망원(파렴치 전과5범의 밀정)을 통해 우연하게도 총련 소속의 현장 감독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 현장감독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던 보안사는 현장감독과 접촉한 국내 사람들을 모두 간첩용의자로 보고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현장감독의 국내 처조카에게 잠바 하나를 전해주었던 하원차랑 선생도 여기에 휩쓸리게 된다.
 
보안사는 정작 재일 북한공작원이라고 발표한 현장감독은 손목도 잡지 못하고, 현장감독의 국내 형제, 처조카와 잠바 하나 심부름했던 애꿎은 하 선생 등을 간첩의 지령을 받고 국내 잠입간첩질을 했다고 구속했다.
하 선생에 따르면, 보안부대에서 감금된 채 두 달 가까이 누구에게도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루 말 할 수 없는 갖가지 고문을 통해 그는 마침내 간첩질을 했다는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간첩지령을) 안 받았다 해도 안 되는 거라. 그렇지 않습니까. 고문 해가지고. 즈그들이 딱, 글 하나 쓰는 것도 지들이 부르는 대로 쓰라는 게지. 글 하나 쓰는 것도 즈그 부르는 대로, 옆에 여기에서 딱 갖다놓고, 즈그 부르는 대로 써야 돼. 안 쓰면은, 안 되는 겁니다, 그게, 못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해안은 가서 뭐 있더냐?’ 이거예요. 뭐 있기는 뭐 있느냐, ‘바닷가에 거기 철조망도 쳐 놓고 거기서’, 그랬더니, ‘그거다 이 새끼야. 그걸 니 일본 가서 이야기 안했냐?’ 이거야. 그게 간첩 죄목입니다. ‘나는 그 얘기할 데가 없었다.’ 이카니께 이 새끼야, 니도 살고 우리도 진급하고 살고, 여기 들어왔으면, 임마, 니 하나 죽여가지고 수채구멍에 하수도에 집어던져버려도 그만이다.’ 억지로 만든 거지. 그때 현장조사 가자그러더라고. 현장조사 가는데, 내 하나 싣고 가는데 지는, 버스에다가 즈그 먹을 거 실컷 싣고, 즈그 회식하러 가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들이, 더 나쁜 사람들이다. 우리 생사람 잡아가지고, ? 당신들 회식하고 진급하고 할라 카느냐.’ 그카니까, ‘요 새끼가 아직까지 덜 맞았구나.’하고 더 두드려 패더라.”

잠 안재우는 거, 전기고문, 물고문 뭐 여러 가지 안 있습니까. 전기고문, 물고문, 잠 안 재우는 거, 또 손톱 여기에 바늘, 이쑤시개 쑤시는 거, 별거 다. 이거이거, (손톱)요 사이에. 그게 얼마나 아픈 줄 압니까. 도저히 그러니까 내가 한 2개월가량 고문 받은 것으로 내가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하 선생은 19837월 구속되어 1990102일 감옥 문을 나섰다. 감옥 사는 동안 공안당국의 모진 전향공작과 회유도 끝내 뿌리쳤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40대는 검은 잉크로 지워졌다. 가정도 온전할 수 없었다. 인생의 40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족과 삶 전체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국가공무원이 되겠다던 자식은 아버지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간 자식은 느그 아버지 간첩질 했으니까라는 소리를 들으며 냉대와 차별을 참아야 했다.
선생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할 때도 사건 신청을 하지 않았다. 생계에 바쁘기도 했거니와 정부 앞잡이는 똑같은 놈이다라는 생각에서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선생과 같이 곤욕을 치른 공범한 사람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사건 신청을 했고, 그이가 선생도 진실화해위원회에 억울한 자초지종을 얘기하라고 강권해서 불신감을 가지고 조사관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을 만나 조서를 꾸미고 나서’, 이 사람들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조사관은 사건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에는 민간인 출신의 조사관도 있었지만, 경찰이나 검찰, 심지어 국정원과 보안사에서 파견된 조사관들도 같이 근무하고 있었다. 하 선생이 만난 조사관은 현직 경찰로 경찰청에서 파견한 조사관이었다. 이 조사관은 사건 전체를 냉정하게 규명했을 뿐더러 하 선생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하고 미처 신청하지 못한 하 선생의 억울한 사연까지 진실규명에 포함되도록 사려 깊은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사례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여럿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사건 진실규명 이후 선생은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확정선고를 받았다. 또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배상 소송에서 얼마간 국가배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가족의 행복을 나락으로 빠트린 국가의 배상이라는 것이 선생은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이후 돌변한 사법부의 처사도 이해하기 어렵다. 비슷한 피해자들끼리 배상금액의 차이가 너무 커 도대체 엉뚱하기만 하다. 또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몇 일, 몇 달 늦게 제기했다는 이유로 즈그 마음대로국가배상 책임 없다고 발뺌하는 판결을 보면, 보안사나 대법원이나 예나 지금이나 즈그 마음대로하는 것은 달라진 게 없다.
 
출소 후 선생은 중장비 기술을 이용해 한시도 쉬지 않고 공사현장을 뛰어다녔다. 감옥에서 인연을 맺은 민가협에도 당시는 자주 나가지 못했다고 미안해한다. 선생은 사회에서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허물어진 자신과 가족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타고난 성실함과 뚝심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후 선생은 7년 전부터 밀양에 정착해 살고 있다. 이제는 틈나는 대로 서울까지 내려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가려고 애쓰고 있다. 자식들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지만 선생은 죄인 마냥 조심스럽기만 하다. 세상을 향해 아무런 죄가 없다고 거침없이 소리치지만, 자식 앞에서만은 죄인이 된 심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선생의 손등은 검붉게 변해 있다. 이제는 노동의 현장을 떠났지만 힘겨운 세월, 노동의 딱지는 훈장처럼 선생의 손등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다. 건강도 예전만 못하다.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엊그제 퇴원했다.
밀양에서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를 물리치고 5월 민가협 후원주막에 참석한 하 선생은 오랜만에 만난 옛 감옥동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한 나절 주막을 지키며 여러 동료들과 안부를 묻다가 다시 석양이 번지는 관악산을 뒤로하고 서울역을 향했다. 세월을 속일 수 없는 경상도 노인의 굽은 등이 긴 그림자를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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